[예술] - [모더니즘을 알아보자] 1. 역사적 배경과 과정

 

[모더니즘을 알아보자] 1. 역사적 배경과 과정

재현을 거부하는 순수 미술 그림의 조형적 요소들을 세계의 재현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미학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그림, 이것이 모더니즘이 추구한 '순수 미술'의 가장 기본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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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의 일생 

 

 

마네는 파리의 부유한 법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드로잉을 좋아했지만 법관인 아버지는 아들이 법대에 진학하기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마네는 법대 진학은 무리였고 그 후 아버지의 권유로 해군 사관학교에 지원하지만 낙방한다. 거듭되는 실패로 결국 아버지는 마네가 미술 교육을 받는 것을 결국 허락하고 당대 유명한 영향력 있는 화가의 화실에 등록하여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1856년 마네는 자신의 작업실을 꾸렸고 1861년 살롱전에서는 선정되기도 하였지만 그 후 계속 낙선한다. 새로운 세대의 화가들은 마네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였지만 당시 미술계의 주류에서는 마네의 작품을 좋지 않게 보았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1863, 유화, 208x264.5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1863)과 <올랭피아>(1863)을 발표함으로써 대중의 과도한 비난을 받게 된다. 살롱전의 낙선전을 모아 진행된 1863년의 '낙선전'에서 전시된 <풀밭 위의 점심>은 당혹스러운 주제뿐만 아니라 표현 형식으로도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참신성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으며 그 이후 화단뿐만 아니라 문단에서도 열렬한 지지자를 얻었다. 그리고 그 후에 대두될 인상주의에의 길을 여는 기연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마네는 이렇게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지만 정작 본인 자신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에 단 한 번도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권위 있는 기성 미술계인 살롱전에서 인정을 받고 성공하길 희망했다. 

마네는 매독으로 고생을 하다가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의 후유증으로 51세로 사망한다. 

 

 

그는 시인 샤를 보들레르, 소설가 에밀졸라 등이 속한 지식인들의 모임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는데 이때 시절을 묘사한 작품으로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1862)가 있다.

By Édouard Manet - National Gallery, London,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7843928

 

에밀졸라는 이 화가가 '실제로' 존재하는 그림의 사실을 직시하고 그 사실에 꾸밈없이 충실한, 그러면서도 미적인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옹호했다. 즉 미술작품이란 그것 자체가 하나의 물질적 '사실'로서, 그림에 담긴 혹은 재현된 세계보다 물감과 캔버스라는 그림의 사실이 미적으로 구성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물감의 구성과 운용을 현대 회화의 새로운 근거로 제시한 졸라의 관점은 미술이 예술의 자율성을 향해 나아가는데 중요한 발걸음이 되었다. 

 

 

 

 

1863년 

 

 

모더니즘에서 매우 중요한 해다. 모더니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그림,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1832-1883)의 <올랭피아 Olympia>(1863)가 나왔고 글 샤를 보를레르 Charles Boudelaire(1821~1867)의 「현대 생활의 화가」가 나온 해이기 때문이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1863, 유화, 190x130.5

올랭피아가 모더니즘의 시초라고?

 

 지금의 현대의 시각에서 본다면 마네의 올랭피아는 고전주의의 누드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여 이것이 모더니즘의 시초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무리 초기라지만 재현의 거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비껴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당시 19세기 중엽에도 고전주의라는 미학적 기준은 아카데미에 의해 완강히 유지되었으며 마네의 회화들은 그 규칙들에 이탈되는 그림으로 간주되었다. 이 올랭피아는 모더니즘으로 향하는 조용하되 단호한 첫걸음이었다. 누드화로 누드화의 전통을 공격하면서 고전주의의 내파로 발걸음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1865년 살롱전을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된 올랭피아는 아주 적대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아름답고 고상하다고 여겼던 누드의 전통을 타락시킨 외설이라는 것이었다.

 

그이 유로는 첫 번째 마네가 그린 누드는 신화 속의 비너스가 아닌 당대 현실 속의 여성, 그것도 매춘부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의 모델은 사실 매춘부가 아닌 화가이자 모델로 알려진 빅토린 뫼랑 victorine Meurent이었지만 그녀를 알고 있던 아니든 간에 그림의 누드는 여신이 아니라 일반 여성임은 분명하였다. 부드럽고 풍만하고 아름답게 가다듬어진 이상적인 누드의 여체와는 다르게 현실적인 여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제목 '올랭피아 Olympia'부터 문제였다. 올랭피아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춘희」(1848)에서 부끄럼 없는 당돌한 매춘부 캐릭터로 1860년대 파리에서는 매춘부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림에서는 커다란 붉은 난, 황금 팔찌, 진주 귀고리와 동양문양의 숄 등 관능의 상징들이 나열되어 있고 목의 검정 리본과 슬리퍼등은 당시 유곽 내실에 고여 있는 성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며 암시하는 단서들이다. 

 

둘째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그림 너머를 정면으로 쏘아보고 있는 올랭피아의 시선이다. 이것은 당대 관람자들을 가장 당황스럽게 한 요소로 알려있다. 이전 누드화에서의 비너스들은 눈을 감고 있거나 먼 다른 곳에 두고 있거나 관람자를 바라본다고 해도 온화하게 바라보는 형태였지 이렇게 정면의 도발적인 시선은 아니었다. 이 시선은 그림 앞에 서 있는 관람자를 특정하게 부각하는데 이것은 누드화에서 오랫동안 은폐되어 왔던 성적 대상화의 위치다. 고전 비너스의 조건을 비켜가는 <올랭피아>는 매춘부의 벗은 몸으로 누드화의 전통이 드러내지 않았던 성적 대상화를 폭로하였다. 

 

셋째는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누드화의 규칙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고전 누드화의 기본은 명암법을 섬세하게 구사한 완벽한 모델링이 필수였다. 하지만 올랭피아에서는 입체감을 위한 중간 색조들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신체는 매우 빈약하고 평면적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강한 색채 대비에 압도되어 보인다. 이런 점에서 마네의 그림은 여성 신체의 묘사가 중심이 아니라 화면을 가로지르는 대비되는 색감들의 미묘한 대위적인 구성이 중심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전 누드화에서는 비너스의 형상에 초점을 맞추고 주변은 휘장이 드리운 침상이든 목가적인 풍경이든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뒤로 물러나 있는 형상으로 전통적인 위계가 설립된다. 그러나 마네의 올랭피아는 형식에서 누드화이면서 주제인 누드보다는 강한 색채의 면과 물리적인 물감 처리가 두드러지는 색다른 화면이 만들어지게 된다. 바로 이점 때문에 그린버그가 마네의 회화들을 최초의 모더니즘 회화라고 꼽은 이유다. 

 

마네의 그림들은 ······그림이 그 위에 그려지는 바탕의 평평한 표면을 ······ 솔직하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사실주의적인, 즉 환영주의적인 미술은 매체를 숨기면서 미술을 은폐하기 위해 미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미술에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미술을 사용했다. 과거의 거장들은 회화라는 매체를 구성하는 여러 한계 - 평평한 표면, 그림 바탕의 형태, 안료의 속성- 를 오직 암묵적으로나 간접적으로밖에는 인정될 수 없는 부정적인 요소로 취급했다. 반면 모더니즘 회화는 이 똑같은 한계를 공공연하게 인정될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린버그 「모더니즘 회화」-

 

 

화가의 관심사는 이제 대상과 그 대상이 존재하는 3차원 공간을 묘사하는 세계의 재현을 떠나 2차원 평면에 그려지는 회화 자체의 미적 구성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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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르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 1915, 리넨에 유채, 79.5 x 79.5

 

러시아의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린다. 작품들은 미니멀리즘의 효시로 그 의미가 있다. 그가 활동한 절대주의는 '순수한 회화 미술'로 간주되었다. 추상 회화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까지 밀고 감으로써 추상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예술은 예술을 시각적 향유로서가 아닌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인지하게 했다. 

 

 

<Black square>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트레차코프 미술관은 '검은 사각형' 발표 100주년을 맞이해 x선 촬영을 통해 그림을 조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그림 밑에 2점의 그림과 작가의 노트를 발견하였다. 검은색 표면 아래에는 입체파 그림이 2점이 그려져 있었는데 초기 그림은 Cubo-Futurist인 구도이고 다른 한 점은 Proto - Supermatist 구도라고 밝혔다. 그리고 테두리 부분에서는 화가가 직접 쓴 글도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동굴에서 싸우는 흑인들'(Negroes battling in a cave)으로 적혀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송 보도에 따르면 이 글은 프랑스의 유머 작가 알퐁스 알레(1843~1905)가 그린 검은 사각형의 제목인 '밤 지하실에서 싸우는 흑인들'을 모방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이 전문가들의 가설이 맞다면 화가의 작품은 프랑스 작가 알레의 그림에 영향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으로 '검은 사각형'이 그려지게 된 과정에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될 것이다. 이 그림은 우리 돈으로 1조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작품은 러시아, 트레샤코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흥미로우면서도 예민할 수 있는 이야기가 밝혀졌는데, 과연 비평가 및 이론가들은 이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내놓을지 궁금하다

 

 

 

 

 

 

재현을 거부하는 순수 미술 

 

 

 

그림의 조형적 요소들을 세계의 재현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미학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그림, 이것이 모더니즘이 추구한 '순수 미술'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이다. 이러한 미술은 '난해하다'이 특징이다. 이 난해함의 원인은 순수 미술이 미술 자체에 대한 직관적 이해와 정면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림이나 조각품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이 아무래도 미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일 것이다. 이 생각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예술은 영웅이든 신이든 무엇인가를 재현했던 전통이 뒷받침한다. 이것은 앙드레 바쟁(1918~1958)에 의하면 미술의 시작은 의미 있는 존재의 외형을 보존하여 죽음과 망각으로부터 빼내고자 하는 심리적 충동이다.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서 시작되는 미술의 재현적 특징을 과감히 버리는 것이 바로 모더니즘이다. 미술보다 훨씬 더 재현을 성공적으로 하는 사진 기술의 발달을 시작으로 미술은 점차 재현의 성질에서 벗어난다. 물리적 현실을 유사하게 재현하는 것에서 정신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미학적 충동으로 도약하였고 여기서부터 미술은 이전과 전혀 다른 미술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구사하게 된다.  

 또한 칸트는 합리적 인식(과학)이나 도덕적 실천(윤리)과 구별되는 감각과 상상력의 영역을 따로 정립하였다. 미적 경험을 할 때 인간의 정신은 어디에도 종속 없이 자유롭게 유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적 즐거움은 정신적인 것으로 오직 미적 판단에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미술 영역은 자율적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칸트의 미학은 예술을 위한 예술과 유미주의에서 급진적이고 공격적으로 구체화된다. 예로 테오필 고티에는 미를 완전히 쓸모없는 것이면서 그래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면서 예술을 완전한 무상의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유미주의로 예술은 사회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이것은 예술이 사회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율적인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유미주의자들은 오직 예술만이 인간의 정신 능력들을 자유롭고 조화롭게 하며 순수하고 강력하게 향유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당시 현대 산업 사외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이런 불순한 산업 사회, 이 세계를 예술이 재현할 이유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재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모더니즘의 미학적 가치이다. 

 

순수한, 자율적 예술을 통해 불순한, 타율적 사회를 부정하는 예술이 모더니즘이다. 

 

 

 

 

 

모더니즘은 급진적인 몇 예술가나 비평가에 의해 한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860년 프랑스에서 시작해서 1960년 미국에서 막을 내렸으니 거의 10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과정은 크게 3단계로 구별이 가능하다. 

 

- 초기 모더니즘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회화) - 캔버스와 물감 같은 그림의 조건에 대한 발견을 통해 '순수한' 미술이라는 미술사상 초유의 개념을 형성

 

- 전성기 모더니즘 (20세기 전반의 유럽 회화) - 그림이라는 매체의 본성, 특히 평면성을 사상 처음으로 인정하고 수용하여 추상이라는 순수 미술의 조형 언어를 만들어냄 

 

- 후기 모더니즘 (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까지) - 전쟁 전의 유럽 추성 회화의 전통을 계승하여 순수 미술을 현대 미술의 지배적 전통으로서 제도화하는데 기여

 

기호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세 단계는 미술이 그 의미를 세계에 의존했던 기호(재현 미술)로부터 세계와 단절하고 스스로 의미를 발생시키는 자율적 기호(순수 미술)로 전환해 간 과정을 점진적으로 보여준다. 

 

 

 

 

[모더니즘을 알아보자] 2. 모더니즘의 시초,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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